가족들이 정말 오랜만에 이사를 한다. 재개발 소식이 들리기 시작한 지 오 년은 된 것같은데, 그 이후로 한국에 갈 때마다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고 마음준비를 해두려고 했는데, 정작 이사날이 다가오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고 뭘 할 수도 없는 감정들이 마음을 휩쓴다. 역시 한 번 더 가봤어야 했는데. 원래 거주민 이사 예정 달은 작년 8월이었다. 동네 자랑인 벚꽃 피는 거 한 번 더 보면 아쉬운 마음이 덜할까 싶어서 작년 4월에 비행기표를 사뒀었는데 코로나가 세계적으로 퍼지면서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이사 일정이 밀리면서 조금 많이 무리하면 한 번 더 가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만 계속하다가 가지 못했다. 차라리 안 보는 게 어쩔 수 없는 마음을 견디는 데 더 낫지 않나 싶어서 안 간 것도 있다. 크고 작은 쓰레기들을 집에 방치한 채로, 반쯤 빈 단지에서, 문 앞에 출입금지 딱지를 붙이고, 딱히 값나가는 것도 아니지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짐을 실은 용달을 타고 이사를 나가는 장면만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져서. 근데 또 이게 뭐 별거라고, 그냥 머릿속에서 계속 생각만 하니까 더 슬퍼진 것 같아서. 역시 가볼 걸 그랬지.
이 집에 이사 오기 전까지 우리 가족은 매해 이사를 다녔는데, 이 집에선 정말 오래 살았다. 아빠가 이사하기 전 버스를 타고 나와 함께 이 집에 왔던 기억이 난다. 어린 나에게 네모난 아파트가 아닌 집이 너무 놀라워서, 다음날 유치원에 가는 셔틀버스 안에서 친구들에게 동화책에 나오는 집으로 이사 간다고 떠벌리고 다녔다. 아빠는 당시 일곱살이었던 나를 데리고 집에 들어가기까지 했는데, 한참 후에 내 방이 될 방문에 붙어있던 치토스 스티커 같은 것들도 기억이 난다. 엄마아빠는 이사 날이 다가오자 나를 외조부모님 집에 맡겼다. 얼마나 오래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놀 거리가 없는 어린이에게는 꽤 긴 시간이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이 집에 돌아왔고, 몇 주 후에 걸어서 십 분 거리인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입학식은 할머니 손을 잡고 갔다. 할머니도 아직 낯선 동네여서 조금 헤맸는데 나는 우리가 크게 길을 잃은 줄 알고 엄청 무서워했다. 중간중간 벤치도 많고, 놀이터도 많은 동네였다. 집에 가기 위해 지나칠 수밖에 없는 벤치에는 수업이 일찍 끝나는 토요일마다 근처 교회에서 나온 사람들이 사탕이랑 휴지 같은 것을 나눠주었는데, 거절이 어려웠던 나는 토요일마다 이 것이 큰 스트레스였다. 할머니가 친구들이 집에 오는 것을 별로 안 좋아해서 (특히 오빠 친구들이 끓여놓은 보리차를 다 마셔버리는 것을 정말 질색했다.) 친구들을 집에 자주 데려오진 않고 내가 친구들 집에 자주 갔다. 단지 내에서도 건물 생김새가 다른 집에 갈 때면 공간이 주는 그 다른 분위기가 신기했다.
당시에 나는 오빠와 윗방, 할머니는 아랫방, 엄마아빠는 안방을 썼고 오빠는 침대에서 나는 바닥에서 요를 깔고 잤다. 내가 내 방을 가지고 싶어 하자 엄마아빠는 베란다에 스티로폼을 깔고 장판을 깔아 베란다 샷시를 닫고 내 방이 있는 기분을 좀 내게 해주었다. 하지만 베란다 방은 너무 춥고 너무 더운 데다가 종종 쥐가 들어올 때도 있어서 도저히 잘 수가 없었다. 베란다는 주차장과 맞닿은 작은 잔디밭과 뒷문으로 이어져있었는데 1층 사는 사람들은 여기에 장독도 놓고 빨래줄도 놓고 그랬다. 이웃집 할머니들은 우리집에 올 때마다 늘 베란다 창문을 현관벨처럼 치며 뒷문으로 들어오셨다. 우리 집 창문이 보이는 곳에 내 키보다 조금 큰 복숭아 나무가 있었는데, 열매가 날 때마다 길가는 사람들이 따가서 나는 결국 하나도 못 먹어봤다. 나는 꽤 클 때까지 어두운 걸 무서워해서 엄마가 방의 불을 끄면 윗방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있는 불을 키고 문을 조금 열어놨었다. 어두운 게 더는 무섭지 않을 때도, 이건 약간 습관이 되어서 그 불빛에 읽고싶었던 책도 읽고, 피아노 숙제를 안 한 날은 머릿속으로라도 치면 한 번 친 거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면서 악보를 보기도 하고 그랬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할머니랑 같이 아랫방을 썼는데 밤엔 아랫방이 너무 추워서 잠바를 입고 생활해야 했다. 보일러를 여러 번 고쳐서 나아지긴 했지만, 이 집은 여전히 윗방이 제일 덥고, 아랫방이 제일 춥다. 아랫방엔 계단 밑 공간을 활용한 광과 벽장이 있는데, 어렸을 때는 이 공간들이 너무 무서워서 잘 열어보지 않았다. 1층인 집들은 계단 아래 지하실도 있었는데 우리 집은 김치냉장고를 살 때까지 이 지하실에 김치 항아리를 두었다. 김치가 더 필요하면 엄마랑 같이 양은 그릇에 가위를 담아 지하실로 향하곤 했다. 김치뿐 아니라 할머니가 겨울에 식혜같은 걸 만들면 차게 먹으려고 문 앞 계단에 두는 경우도 많았다.
진학 가능한 구역 내에서 가장 가까운 곳은 남자 중학교여서, 40분은 걸어야 하는 여자 중학교에 진학했다. 고등학교는 집에서 가까운 곳을 갈 수 있었지만, 학교에 있어야 하는 시간이 길어도 너무 길었다. 게다가 집, 가족, 동네 밖의 세상에 너무 재밌고 신기할 때라 집에서의 시간이 많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할머니가 거동이 어려워지면서 계단을 쓸 필요가 없는 안방을 나와 같이 쓰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시험 기간 때마다 내가 밤늦게 불을 켜놓는 걸 싫어했다. 오빠가 통학이 불가능한 곳으로 대학을 진학하면서 윗방이 내 방이 되었다. 인생에서 처음 가져보는 내 방이라, 지금 보면 좀 많이 부끄러운 스탠드 아크릴 물감으로 칠하기, 좋아하는 밴드 이름 아크릴 물감으로 책장 위에 쓰기, 나무 모양 벽지 스티커 사서 멀쩡한 벽에 붙이기 등 정말 이상한 인테리어를 많이 시도했다. 책상에 앉으면 밖으로 나무와 놀이터 전경이 보였는데 아빠는 종종 그 자리에 앉아서 이런 자리가 있으면 공부가 절로 되겠다는 말 같은 걸 자주 했다. 계단은 공간을 구획하는 힘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2층 방을 쓰면서 가족들과 이야기하고 싶지 않을 때, 공동의 공간에 나가고 싶지 않을 때를 좀 더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었고, 이것이 나의 어떤 부분을 형성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아랫방도 계단으로 구분되어있긴 했지만, 윗방은 일단 ‘올라가야’하는 공간인 데다가 계단이 중간에 꺾이기도 해서 문을 열어놔도 공동공간에서 방을 볼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어서 더 그랬다.
대학교에 진학한 후 집에서, 단지에서 시간을 더 많이 보냈다. 등하굣길을 걸을 일이 없으니 그 길을 좀 돌아서 산책도 하고, 시간이 많으니 버스 정류장에 그냥 앉아있을 때도 많았다. 계절마다 변하는 나무도 많고, 서울로 들어가는 버스도 많고, 늘 음악을 들을 거리도 들고 다녀서 그냥 앉아있어도 별로 심심하지 않았다. 버스에 적힌 정류소들을 보면서 막 익히기 시작한 서울 지리를 곱씹어보기도 했다. 대학교 때는 몸이 피곤할 때까지 돌아다니는 일이 많았던 것 같은데 버스가 단지로 들어서면 안심이 됐다. 5시쯤 일정이 끝나는 날이면, 서울에서 넘어오는 구간이 엄청 막히는 버스 대신 지하철을 탔다. 대학교 1학년 때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소식을 들어서 바로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가는데 날이 너무 좋아서 이상한 기분이었다. 이 때의 감정이 지금 어쩌지 못하는 감정과 비슷할까. 이것도 너무 오래된 기억이라서 잘 모르겠다.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집 안의 사소한 것들이 바뀌었다. 집에서 김장을 더 이상 하지 않게되었고, 빨래는 뒷잔디에 자란 나무 사이에 걸린 빨래줄 대신 건조기를 펼쳐 말리기 시작했고, 식수는 생수를 사다먹기 시작했다. 전에는 배추 절이는 데라도 썼는데, 김장을 안하니 우리 집 욕조는 전혀 쓸 데가 없어졌다. 어머니 아버지 두 분 다 여행 다니시는 걸 좋아하셔서, 집이 비어있을 때가 잦았고, 나는 늘 공간에 돈을 내고 다녀야 하는 친구들을 공짜라는 빌미로 우리 집에 자주 초대했다. 엄마는 내가 누굴 집에 데려왔었다고 얘기할 때마다 집 꼴이 이런데 누굴 부르냐고 창피해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청소, 정리 등에 관심이 있는 가족 멤버가 없어서 좀 되는대로 살았던 시기였던 것 같긴 하다. 하지만 좋아하는 친구들과 같이 밥해 먹고 티비보고 요깔고 자는 시간 정말 재밌었고, 이 친구들도 이 집에서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겠지 하고 생각하면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대학생 때 시간이 많았다지만 사실 정말 할 일 없이 집에서 시간을 많이 보낸 때는 내가 뉴욕으로 주 거주지를 옮긴 다음이었다. 한국에 3주 정도 휴가를 내고 오면 평일에는 크게 할 일도 없고 시차때문에 졸려서 기운도 없으니 마루에 누워서 나무가 흔들리는 그림자 같은 걸 볼 때가 많았다. 동네 산책을 하면서 뭐가 남았고 뭐가 없어졌나를 보기도 하고, 아직도 낯선 길이 있는지 아무 골목에서 꺾어보기도 하고 그랬다. 시차를 좀 극복하고 나면 역 주변 상업지구에서 퇴근하는 동네친구들을 기다렸다가 같이 떡볶이도 먹고 노래방도 가고 가로등 앞 벤치앞에서 모기 때문에 계속 다리를 때려가며 이야기도 나누었다. 그러다가 시간이 늦어지면 친구들은 꼭 중고등학교 때처럼 나를 단지 앞 횡단보도까지 데려다줬다. 어디를 가도 길을 잃을 수가 없는 이 동네는 내가 한국에 살고 있다는 생활의 감각을 가지게 해주었다. 이 집이, 이 동네가 사라지면 이 감각은 어떻게 되는 건지를 모르겠다. 재개발은 아파트 키드들이 몇 번씩 겪어야 하는 감기나 사춘기나 그런 거니까 나 혼자 고향 잃은 사람처럼 유난 떨지 말자 싶으면서도 남들 다 아프다고 내가 안 아픈 건 또 아니니까 쉽게 마음이 가라앉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