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에 대해서


한국에서는 너무 많은 말이 들린다. 지나가는 어린이의 라면 취향도, 충청도 방언으로 점철되어있는 아빠와 삼촌의 대화도 하나도 빠짐없이 들린다. 한국에서는 대체로 쏟아지는 모어에 취해있다. 이 언어로는 뭐든지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주정을 부리다가, 그렇다고 딱히 뭐 크게 할 수 있는 건 없구나 하고 취기를 떨치면서 뉴욕에 돌아온다.

나는 내 스스로를 이중언어사용자-바이링구얼-라고 말하는 것이 좀 쑥스럽다. 어려서 자연스럽게 습득한 언어도 아닌데 이중 언어 사용자라고 해도 되나. 관사 정관사를 이렇게 꾸준히 계속해서 미친듯이 틀리는데 이중언어사용자라고 할 수 있나. 二重이라면 둘이 똑같이 무거워야 하는 거 아닌가. 영어를 모어와 같은 무게로 내 마음의 저울에 올려 둘 수가 있나. 도저히 그럴 수는 없다.

내 마음의 저울이 어떻든, 내 한국어에는 턴다고 털어도 계속 먼지가 쌓인다. 그래서 한국에 있을 때는 한국어에 먼지가 쌓일 겨를이 없게 계속해서 뭔가를 강박적으로 읽는다. 한 달 조금 넘는 기간 동안 여기저기에서 빌리고 사들인 책들이 스무 권 정도 되었다. 다 제대로 읽지 못한다. 읽으면서도 이 책이 지금 내가 읽을 수 있는 최선인지, 계속 초조해하면서 읽는다. 이런 류의 독서를 하면 책에게 미안할 뿐만 아니라 독자인 나도 몹시 피곤하다. 하루 종일 먼지털이 쇼핑만 하는 기분이다.

이번엔 세계 도처에서 영어를 모어로 사용하는 친구들이 여럿 한국을 방문했다. 영어가 모어인 친구들과 있으니 숨 쉬듯이 자연스러웠던 나의 모어가 퍼포먼스가 된다. 영어와 밀착되어있는 뉴욕에서의 생활이 한국에서의 생활과 엉키기 시작한다. 장소로 갈라둔 두 개의 생활이 서로에게 들러붙기 시작해서 정신이 하나도 없다. 삶을 구획할 수 있다는 것은 착각이다. 생활은 서로 뒤섞이고 언어도 섞인다.

각각의 언어가 머무는 곳은 서로 떨어져 있어도 그 장소를 오가는 내 안에 언어가 있으니 섞일 수 밖에. 나는 나에게 영어로만 드는 생각이 있다는 걸 의식하기 시작했다. 단순한 예를 들자면 이렇다. 서울에서 아침마다 별 일이 없으면 숙소 근처의 한강공원을 걸었다. 한강둔치를 목적없이 걸으면서 한강을 바라볼 때 하던 생각은 large body of water. 자연스럽게 단어를 떠올렸고 여러 번 곱씹었다. 물의 압도적인 양감을 중립적으로, 간단하게 표현할 수 있는 한국어가 내 안에는 없다. 이중언어사용자라는 정체성이 쑥스러운 나는 영어로만 떠올릴 수 있는 단어들도 쑥스럽다. 내가 뭘 언제부터 영어를 그렇게 자연스럽게 사용했다고. 그래도 some words come in English.

최근에 읽은 것 중 가장 쓸쓸한 글은 Yiyun Li의 To speak is to blunder였다. 이 글에서 작가는 that she disowned Chinese, her mother tongue, and would never write in Chinese. 작가는 영어로 색인될 수 없는 기억들은 버리는 것을 선택했다. The memories that she reindexed with English now come to her dream in English. 그럴 수가 있나. 이미 그래버린 작가 앞에서 정말 쓸 데 없는 질문이다. 나의 가장 오래된 벗이 정말 유치한 질문일 수 있는데… 하며 이제 꿈도 영어로 꾸냐고 물어본 기억이 난다. 내가 뭐라고 대답했더라.

다와다 요코의 에세이집인 여행하는 말들을 재미있게 읽었다. 작가는 독일어와 일본어 두 언어로 글을 쓰는데, 다양한 언어를 배우는 것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언어 사이의 공간을 탐색하는 것에 흥미가 있다고 밝힌다. 작가의 목표는 독일어를 잘 쓰는 것이 아니라, 독일어가 모어인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영역의 독어를 쓰는 것. 작가가 포착해내는 언어 틈새의 공간은 새로운 가능성의 공간이라서, 어쩌다보니 이 세계에서 이중언어사용자가 되어버린 나도 조금 씩씩해진다. 일단 영어인간들이 상상도 못할 영어를 쓰긴하는데.

두 작가는 다중언어를 사용하는 환경에서 절망편과 희망편 같아 보이기도 하지만, 희망과 절망 역시 딱 떨어지지 않는다. 다와다 요코가 말하는 모어 사용자의 상상력 밖에 있는 언어는 묘하게 parallels with how English is a private salvation for Yiyun Li, Yiyun Li의 은유에 대한 신념은 다와다 요코의 시적 공간에 대한 메타포를 떠올리게 한다. Yiyun Li의 강연을 찾아보다가 작가가 본래 의도한 제목은 To speak is to blunder but I venture 였다는 걸 알게되었다. but I venture가 어떤 맥락으로 쓰였는지 감이 잘 안와서 번역기에 넣어보니 감히 말한다라고 나온다. 말하는 것은 실수하는 것과 마찬가지이지만 나는 감히 말한다.